알랭 드 보통 저/정영목 역
도서관에서, 딱히 정한 책 없이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발견한 책이다.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저자의 이름과, 심플하지만 왠지 심오할 듯한 책 제목에 끌려 그 자리에서 잠시 도입부를 읽어 내려갔다.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적잖이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내용과 저자가 풀어놓은 독특하고 개성있는 문장과 구성에 감탄하여 빌려오게 되었다.
책은, 사회적인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불안을 주제로 다룬다.
세속적인 삶에서의 지위를 갈망하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과 그 갈망의 양만큼 더 커질수 밖에 없는 불안의 측면을 예기한다. 불안이 생기는 근원적인 원인을 통찰력있는 글과 인용으로 풀어나가고 이러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인간 삶의 궁극적 가치를 생각해 보게 하는 철학, 예술, 종교적 사례와 접근법을 소개한다.
책은 먼저 지위를 정의하면서 출발한다.
- 협의의 의미, 그러나 사전적 의미: 한 집단 내의 법적 또는 직업적 신분.
- 광의의 의미, 그러나 실제적 의미: 더 넓은 의미에서는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
높은 지위는 즐거운 결과를 낳는다. 이 결과에는 자원, 자유, 공간, 안락, 시간이 포함되며, 남들에게 먼저 배려받고 귀중하게 여겨진다는 느낌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런 느낌은 다른 사람들의 초대, 아첨, 웃음(농담이 썰렁할 때도), 경의, 관심을 통해 당사자에게 전달된다. 높은 지위를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꼽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놓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이런 지위를 갈망하면서 생기는 불안을 안내(?)한다.
우리가 사다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우리의 자아상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사람들(소크라테스나 예수)은 다르겠지만, 세상이 자신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하면 스스로도 자신을 용납하지 못한다.
지위로 인한 불안은 비통한 마음을 낳기 쉽다. 이 갈망도 지나치면 사람을 잡는다.
도입의 마지막으로 책을 쓴 동기를 설명한다.
사회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누구나 안정적이고 높은 지위와 부를 바란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목표를 세우고 매진하며 때론 성공의 축배도 들지만 (그 보다는 더 자주) 실패의 쓴맛을 맛보기도 한다. 이런 삶속에서 인간은 항상 불안을 느끼게 되며 삶의 궁극적 가치를 망각하여 인생 전반을 자신도 모르게 암울하게 살다 갈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저자는 뭔가 거창한 해법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의 구문에서 저자의 집필 동기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도입을 지나, 불안의 원인을 5가치 측면에서 설명한다.
1. 사랑결핍, 2. 속물근성, 3. 기대, 4. 능력주의, 5. 불확실성
사랑결핍이라??
불안의 요인으로 제시한 5가지 중, 목차만으로는 쉬이 이해하기 힘든 제목이었다.
높은 지위 즉 돈, 명성, 영향력에 대한 인간의 갈망은 궁극적으로 사랑을 바라는 마음이라고 설명한다. 사랑중에서도 사회적 사랑을 말한다.
"돈, 명성, 영향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보다는 사랑의 상징으로서 더 중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위와 관련된 사랑을 받는 사람 역시 낭만적인 사랑을 받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호의적인 눈길을 받으며 편안함을 느낀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중략)
지위가 낮은 사람은 눈에 띄지도 않고, 퉁명스러운 대꾸를 듣고, 미묘한 개성은 짓밟히고, 정체성은 무시당한다. 낮은 지위가 끼치는 영향은 물질적인 맥락에서만 볼 수 없다. 낮은 지위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들을 낳기 때문이다.
낮은 지위로 인한 물질적 불편함보다 정신적 고통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높은 지위가 주는 유익은 물질적 부에 한정되지 않는다. 부자들 가운데는 다섯 세대가 써도 남을 만큼 돈을 축적해도 만족할 줄 모르고 계속 모으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놀랄일이 아니다. 부의 창조를 경제적인 이유만 가지고 설명하려 할 때에만 그들의 노력이 이상해 보일 뿐이다. 그들은 돈만큼이나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존경을 추구한다.
이런 맥락에서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의 글을 인용한다.
"이 세상에서 힘들게 노력을 하고 부산을 떠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탐욕과 야망을 품고, 부를 추구하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생활필수품을 얻으려는 것인가? 그것이라면 노동자의 최저 임금으로도 얻을 수 있다. (중략)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하고, 관심을 쏟고, 공감 어린 표정으로 사근사근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알은체를 해주는 것이 우리가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자가 자신의 부를 즐거워하는 것은 부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의 관심을 끌어 모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의 관심 때문에 기운이 나고 무시 때문에 상처를 받는 자신을 보면,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어디 있나 싶어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원인인 속물근성.
속물근성은 아주 적은 예외를 제외한다면 누구에게나 있으며 또한 우리 모두는 속물근성의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살고 있는 듯 하다.
속물 집단은 분노를 일으키거나 죄절감을 안겨준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것으로는 즉, 우리의 지위가 아닌 다른 것으로는 그들이 우리에게 하는 행동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멍청한 아첨꾼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권력이나 명성 때문에 당신을 사귄다고 말하지 않는다. (중략) 유능한 아첨꾼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상대의 지위와는 전혀 관계없는 부분임을 암시해야 함을 안다. 그래서 으리으리한 차, 신문에 등장한 모습, 회사의 임원직위는 자신의 깊고 순수한 애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요소들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아첨꾼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그의 반지르르한 표면 밑에서 변덕스러움을 감지하고 속물의 무리를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운이 좋아 잠시 아슬아슬하게 손에 쥐고 있는 지위가 본질적 자아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속물근성이 자연스레 인간의 본성처럼 굳어져 가는 것은 사회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자연현상과 같은것 일수도 있다. 주변에 늘 마주하는 사회적 상황이 속물근성을 부추긴다는 새커리의 신문에 대한 비판이 무엇보다 와 닿는다. TV프로에 연예인들의 아주 사소한 신변잡기가 뉴스나 화제거리로 매체에 소개될 때 난 새키리와 비슷한 느낌을 늘 받아왔다.
새커리는 영국인이 높은 지위와 귀족계급에 매달리는 원인이 궁극적으로는 신문에 있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매일 작위가 있는 사람과 유명한 사람이 존엄한 존재라고 역설하는데, 이는 결국 작위가 없는 보통 사람들은 시시하다고 역설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중략)
<모닝 포스트>의 궁정란을 보면, 브로엄 경이 브로엄 홀에서 사냥 파티를 열었다는 기사("모두 많이 잡았다"), 애그너스 더프 여사가 에든버러에서 출산할 날이 다가왔고, 조지너 폐이큰햄이 버글리 경과 결혼했다는 기사("신부는 레이스 주름 장식과 코르사주 몽탕을 갖춘 우아한 하얀 새틴 드레스를 입었다. 그녀가 어여뻐 보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등이 눈에 띈다.
"이런 같잖은 기사들이 눈엎에 놓여 있으니 어떻게 속물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새커리는 말한다. "속물근성을 만들어내고 퍼뜨리는 신문을 타도하라!"
얼마전 모 출판사 대표님과 대화 중, 대략 중학교 정도 되는 나이 또래에서 연예인을 지망생이 엄청나다는 예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 주변엔 그 나이 또래가 거의 없어 직접적으로 체감하지는 못했지만 그 분 주위엔 자주 목격되는 현상이라 하니, 이 역시 대중 매체가 부추겨 놓은 비뚤어지고 편합한 선망, 사회적 현상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등장과 사회의 급속한 발전, 그에 따른 기대 특히 상대적 기준에 따른 만족감의 차이를 설명한다. 언젠가 직장인들의 연봉 만족도는 절대적인 돈의 액수가 아니라 동료보다 조금이라도 더 받는 것에 좌우된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또한 평등해진 사회가 가져다 주는 기대와 그에 따른 패배감을 소개한다.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던>(1651)에서 개인은 사회의 탄생 전부터 존재했으며, 오직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 사회에 합류한 것이고, 보호를 대가로 타고난 권리를 내주기로 동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출생과 운에 따른 모든 특권을 폐지했을 때, 모든 사람이 직업선택의 자유를 누릴 때, 야망이 큰 사람은 위대한 일을 쉽게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며, 자신이 비범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을 통해 금세 교정되고 마는 망상이다. 불평등이 사회의 일반 법칙일 때는 아무리 불평등한 측면이라도 사람들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대체로 평등해지면 약간의 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
... 그래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이 종종 묘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온하고 느긋한 환경에서도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자존심은 이룬 것을 목표한 것으로 나눈 것이라는 제임스의 방정식을 소개하며 이 방정식에 의하면 행복해 지기 위한 두 가지 방법 즉 목표한 것을 이루도록 더 노력하는 방법과 목표 자체를 줄이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정식을 제시한 제임스는 두 번재 방법의 장점을 지적한다고 한다.
"요구를 버리는 것은 그것이 충족시키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이다. 어떤 영역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마음이 묘하게 편해진다. 젊거나 늘신해지려고 애쓰기를 포기하는 날은 얼마나 즐거운가. 우린느 말한다. '다행이야!. 그런 환상들은 이제 사라졌어. '자아에 더해지는 모든 것은 자랑거리일 뿐만 아니라 부담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능성의 시대에 등장한 능력주의! 능력주의가 가져다 주는 불안의 측면을 예기한다.
(중략)
성공을 거둔 사람이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면, 실패한 사람 역시 그럴 만해서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 시대를 맞아 정의는 부만이 아니라 빈곤의 분배에도 관여하게 된 것이다. 낮은 지위는 이제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그래 마땅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불안에 대한 요인의 마지막으로 불확실성을 언급한다.
자신의 변덕스러운 재능, 운, 고용주와의 관계와 그의 이익, 세계 경제 등 다양한 요소들을 소개하며 이러한 불확실성에 따른 불안감을 설명한다.
책은 전체적인 글의 흐름을 살짝 방해할 정도로 세부 주제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는데, 이 단락에서도 '음침한 정치적 기술'이라는 것, 15~17세기에 궁정사회의 명민한 귀족들의 정치적 처세의 언급을 소개한다.
"사람은 거짓되고, 음험하고, 기만적이고, 교활하고, 자신의 이익에는 탐욕스럽고 남의 이익에는 둔감하므로, 적게 믿고 그보다 더 적게 신뢰한다면 잘못될 일이 없을 것이다." (구이차르디니)
"세상은 장점 자체보다는 장점의 표시에 보답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라로슈푸코)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다. 주군의 총애를 받는 신하들의 비위를 맞추지도 않고 그들의 미움을 사도 상관 안 한다. 그저 당신의 주군과 의무를 사랑하며 살 뿐이다. 그래, 그래서 당신이 망한 것이다." (라브뤼예르)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 사랑은 감사의 유대에 의해 유지되지만, 사람은 지나치게 이해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이 유대를 끊어버린다. 그러나 공포는 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유지되며 이것은 늘 효과적이다." (마키아벨리)
크게 두 장으로 구성된 책은 앞서 불안의 5가지 원인을 한 장에 걸쳐 설명하고 두 번째 장이자 마지막 장에서는 불안의 해법을 소개한다. 역시 5가지로 구분하면서..
1. 철학, 2. 예술, 3. 정치, 4. 기독교, 5.보헤미안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 때문에 느끼는 불안의 좋은 치유책은 세계라는 거대한 공간을 여행하는 것,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예술작품을 통하여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다.
책에서 제시하는 해법은 어떻게 보면 뜬 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 인간이라면 본성에 가깝게 자리잡은 사회적 인정과 부, 명예와 영향력과 같은 포괄적 지위에 대한 갈망에 파생될 수 밖에 없는 불안을 단방에 해소시킬 은탄환이 존재할리 없다. 그것도 자기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해법을 제시할 것이라는 기대는 더더욱 해서는 안될 것이다. 책에서 제시하는 해법은 보다 근원적이다.
철학!. 이 얼마나 어린 시절 관심없던 주제였던가. 사실 사회적 성장을 목표하여 나름의 노력을 해 오던 나에게도 가장 직접적인 안식처(?) 된 것이 바로 철학이다. 물론 지금도 완전하지 못한 인성과 사회적 선망을 위애 어찌보면 헛된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철학책과 옛 성인들의 격언과 그들의 생활을 듣고/보지 못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황폐한 정신을 가졌을 것이다. 그나마 읽고 음미했던 철학적 메시지들이 중용을 미를 지키려는 노력을 조금이나마 하게 된 계기라 할 수 있다.
철학은 공상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히 이성적이라 할 수 있다. 시대적 상황, 사회적 상황, 상대적인 상황 등에 따른 변덕스러운 가치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의 가치를 이성이라는 도구로 걸러내도록 하여 내면의 평화와 자존감을 올려 준다.
염세적 태도의 전형적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다음의 말은 이러한 맥락의 좋은 본보기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피상적이고 하찮다는 것, 그들의 시야가 편협하다는 것, 그들의 감정이 지질하다는 것, 그들의 의견이 빙퉁그려졌다는 것, 그들의 잘못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점차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철학자들은 함께 모여 연구를 한 것도 아닌데 입을 모아 외부의 인정이나 비난의 표시보다는 우리 내부의 양심을 따르라고 권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질책은 그것이 과녁에 적중하는 만큼만 피해를 줄 수 있다. 자신이 어떤 질책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만만하게 그런 질책을 경멸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
철학 다음 해법으로 예술을 소개한다.
개인적으로 위대한 예술을 특히 고전 예술을 접해보거나 관심을 크게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나 저자의 말대로 예술은 철학 못지 않게 삶의 본연을 들여다 보게 하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위대한 영화도 현세에서는 위대한 예술작품에 버금가는 매체일텐데 영화에서 배우는 많은 삶의 본질을 떠올려보면 과연 예술이 정신 건강에 주는 긍정적 효과를 알 수 있다.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보라. 아널드는 제안한다. 거기에는 (직접적이든 아니든) " 인간의 잘못을 없애고, 인간의 혼돈을 정리하고, 인간의 곤궁을 줄이고자 하는 욕망"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세상을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낫고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갈망"에 사로잡혀 있다.(중략)
그들이 작품에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항의가 나타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교육하고, 고통을 이해하거나 감수성에 다시 불을 붙이도록 돕고, 감정이입 능력을 길러주고, 슬픔이나 웃음을 통하여 도덕적인 균현을 다시 잡아주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일상생활을 묘사한 위대한 화가들은 제인 오스틴이나 조지 엘리엇처럼 세상에서 무엇을 존경하고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속물적 관념을 교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비극과 희극 역시 불안을 경감시키는 예술의 측면으로 소개하는데 먼저 비극을 보게됨으로서 느끼는 주인공에 대한 공감과 자신의 반성이 자만심을 버리도록 돕고 출세지향적 사고의 틀에 영향을 준다고 본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를 얻게 만드는 수단은 늘 변화해 왔다. 불안의 해소로 소개한 것들중 '정치'가 있는데 좀 생뚱맞다. 그러나 저자가 선정한 정치라는 개념은 다음 글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사는 사회의 이상 때문에 불안이나 실망을 느낀 사람이라면 이렇게 대충 살펴본 지위의 역사에서도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실을 간파할 것이다. 그런 이상이 돌로 만들어져 굳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상적인 지위는 오래전부터 계속 바뀌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이런 변화과정을 묘사하는 데 정치라는 말을 사용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글을 통해 변덕스러운 정치적 가치에 한계를 인식하고 궁극의 가치 실현에 관심을 가진다면 적잖이 불안이 해소될 것이라는 기대를 해 볼수 있다.
다음으로 '기독교'를 든다. 좀더 포괄적인 관점에서 보면 '종교'가 될 수도 있겠다.
결국 그의 의문을 가라앉힌 답은 신이었고, 톨스토이는 여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살게 된다. (중략) 이것은 죽음에 대한 생각이 삶의 더 진정한, 더 의미 있는 길의 안내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중략)
이런 소멸의 전망에 위로의 힘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우리의 불안의 많은 부분이 우리의 기획과 관심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상 때문에 괴로워하며,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너무 크게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마지막으로 자유로운 영혼, 보헤미안과 그들의 사상/가치를 소개하며 세속적 가치를 다르게 해석하는 또 다른 집단의 사고체계에서 보편적 진리처럼 과대포장되어온 사회적 지위를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다고 힌트를 주는 듯 하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말에 따르면, 어떻게 살고, 옷을 입고, 먹고, 쓰느냐 하는 문제에서 다른 사람들의 관념에 맞추다 보면 얼굴에 서서히 "우둔한 표정"이 나타나게 된다. 모든 고귀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금언을 따라야 한다. "나는 내가 관심을 가지는 일을 하지, 다른 사람들이 요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에머슨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제 순응이니 조화니 하는 이야기는 더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그런 말들을 관보에 실어 조롱하도록 하자... 이제 결코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지 말자... 이 시대의 매끈한 평범함과 비열한 만족을 모욕하고 질책하자."
서서히 저저의 결론에 도달한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저자 역시 인정하며 다만 선택하라고 충고한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 이 다섯 집단은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수치와 명예의 구분 자체는 유지하면서, 무엇이 각 항목에 속해야 하는지를 재규정하려 했다. (중략)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길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우물안의 개구리'라는 말이 있다. 개구리에게 우물안 세상만이 전부인 것 처럼...
바쁜 일상을 살다보면, 현재 자신이 속한 집단과 그 집단이 해야 할 일에 파묻혀 있다 보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그 속에 견고히 자리잡고 있는 편협한 사회적 가치에 갈망하고 괴로워하는 우리 자신을 드물게 목격하게 된다.
정신이 그나마 조금 풀린 주말 산책 길에서 혹은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논하는 책을 볼때, 교양의 테투리에 포함된 음악을 감상할때, 뛰어노는 아이들이 자신에게 보이는 절대적 신임의 눈망울 속에서.... 간혹 무엇을 위해 이 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사회적 가치와 그에 대한 열망은 늘 우리의 정신을 잠식하는 강력한 지배주로 견고히 다시 자리잡게 된다.
책의 저자도 예기했듯이, 사회적 가치의 긍정적인 측면을 무시하지 않으며 그 가치를 위한 고군분투의 아름다운 측면도 간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가 인생 전반에 끼어들어 정신적 황폐화에 절대적으로 기여한다면 가치의 다양성을 재고하고 인간/인생의 궁극적 가치를 들여다 봄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다독여 주어야 한다.
높은 사회적 지위와 풍족한 물질적 부의 중요성 못지 않게 정신적 부와 인간적 지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보다 풍족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보며,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사회적 지위와 명예, 그리고 영향력과 물질적 풍족함을 위해 내가 가진 능력 범위에서 최선을 다하겠노라.
그 가운데 얻게 되는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라도 절망감 없이 받아 들일 것이다. 다만 가장 명심할 것은 내가 열심히 해 왔다는 증거는 반드시 남겨야 겠다. 그 증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아주 다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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