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Posted in BookLog // Posted at 2014. 3. 30. 15:49

 

알랭 드 보통 저/정영목 역

 

도서관에서, 딱히 정한 책 없이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발견한 책이다.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저자의 이름과, 심플하지만 왠지 심오할 듯한 책 제목에 끌려 그 자리에서 잠시 도입부를 읽어 내려갔다.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적잖이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내용과 저자가 풀어놓은 독특하고 개성있는 문장과 구성에 감탄하여 빌려오게 되었다.

 

책은, 사회적인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불안을 주제로 다룬다.

세속적인 삶에서의 지위를 갈망하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과 그 갈망의 양만큼 더 커질수 밖에 없는 불안의 측면을 예기한다. 불안이 생기는 근원적인 원인을 통찰력있는 글과 인용으로 풀어나가고 이러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인간 삶의 궁극적 가치를 생각해 보게 하는 철학, 예술, 종교적 사례와 접근법을 소개한다.

 

책은 먼저 지위를 정의하면서 출발한다.

사회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 지위(status)는 신분이라는 듯의 라틴어 statum에서 파생되었다.

- 협의의 의미, 그러나 사전적 의미: 한 집단 내의 법적 또는 직업적 신분.

- 광의의 의미, 그러나 실제적 의미: 더 넓은 의미에서는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

 

높은 지위는 즐거운 결과를 낳는다. 이 결과에는 자원, 자유, 공간, 안락, 시간이 포함되며, 남들에게 먼저 배려받고 귀중하게 여겨진다는 느낌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런 느낌은 다른 사람들의 초대, 아첨, 웃음(농담이 썰렁할 때도), 경의, 관심을 통해 당사자에게 전달된다. 높은 지위를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꼽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놓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이런 지위를 갈망하면서 생기는 불안을 안내(?)한다.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 위험에 처했으며, 그 결과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현재 사회의 사다리에서 너무 낮은 단을 차지하고 있거나 현재보다 낮은 단으로 떨어질 것 같다는 걱정. 이런 걱정은 매우 독성이 강해 생활의 광범위한 영역의 기능이 마비될 수 있다. 

우리가 사다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우리의 자아상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사람들(소크라테스나 예수)은 다르겠지만, 세상이 자신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하면 스스로도 자신을 용납하지 못한다.

 

지위로 인한 불안은 비통한 마음을 낳기 쉽다. 이 갈망도 지나치면 사람을 잡는다.

 

도입의 마지막으로 책을 쓴 동기를 설명한다.

사회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누구나 안정적이고 높은 지위와 부를 바란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목표를 세우고 매진하며 때론 성공의 축배도 들지만 (그 보다는 더 자주) 실패의 쓴맛을 맛보기도 한다. 이런 삶속에서 인간은 항상 불안을 느끼게 되며 삶의 궁극적 가치를 망각하여 인생 전반을 자신도 모르게 암울하게 살다 갈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저자는 뭔가 거창한 해법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의 구문에서 저자의 집필 동기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가장 유익한 방법은 이 상황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도입을 지나, 불안의 원인을 5가치 측면에서 설명한다.

1. 사랑결핍, 2. 속물근성, 3. 기대, 4. 능력주의, 5. 불확실성

 

사랑결핍이라??

불안의 요인으로 제시한 5가지 중, 목차만으로는 쉬이 이해하기 힘든 제목이었다.

높은 지위 즉 돈, 명성, 영향력에 대한 인간의 갈망은 궁극적으로 사랑을 바라는 마음이라고 설명한다. 사랑중에서도 사회적 사랑을 말한다.

 

"돈, 명성, 영향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보다는 사랑의 상징으로서 더 중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가족에게 나타나든, 성적 관계에서 나타나든, 세상에서 나타나든 일종의 존중이라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정의해볼 수도 있겠다. (중략)

지위와 관련된 사랑을 받는 사람 역시 낭만적인 사랑을 받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호의적인 눈길을 받으며 편안함을 느낀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중략)

지위가 낮은 사람은 눈에 띄지도 않고, 퉁명스러운 대꾸를 듣고, 미묘한 개성은 짓밟히고, 정체성은 무시당한다. 낮은 지위가 끼치는 영향은 물질적인 맥락에서만 볼 수 없다. 낮은 지위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들을 낳기 때문이다.

 

낮은 지위로 인한 물질적 불편함보다 정신적 고통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불편은 모욕을 동반하지만 않으면 오랜 기간이라도 불평 없이 견딜 수 있다. 병사나 탐험가들이 그런 예다. 그들은 사회의 극빈층이 겪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궁핍을 기꺼이 견디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버녀낸다.

마찬가지로 높은 지위가 주는 유익은 물질적 부에 한정되지 않는다. 부자들 가운데는 다섯 세대가 써도 남을 만큼 돈을 축적해도 만족할 줄 모르고 계속 모으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놀랄일이 아니다. 부의 창조를 경제적인 이유만 가지고 설명하려 할 때에만 그들의 노력이 이상해 보일 뿐이다. 그들은 돈만큼이나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존경을 추구한다.

 

이런 맥락에서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의 글을 인용한다.

"이 세상에서 힘들게 노력을 하고 부산을 떠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탐욕과 야망을 품고, 부를 추구하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생활필수품을 얻으려는 것인가? 그것이라면 노동자의 최저 임금으로도 얻을 수 있다. (중략)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하고, 관심을 쏟고, 공감 어린 표정으로 사근사근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알은체를 해주는 것이 우리가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자가 자신의 부를 즐거워하는 것은 부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의 관심을 끌어 모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 농담을 즐거워하면, 우리는 나에게 남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자신을 갖게 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면, 나에게 큰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방에 들어갔을 때 눈길을 피하거나 직업을 밝혔을 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 이상적인 세계에서라면 이렇게 남들의 반응에 좌우되지는 않을 것이다.(중략)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나라는 사람에 대하여 아주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내가 똑똑하다는 증거도 댈 수 있고 바보라는 증거도 댈 수 있으며, 익살맞다는 증거도 댈 수 있고 따분하다는 증거도 댈 수 있으며, 중요한 인물이라는 증거도 댈 수 있고 있으나마나 한 존재라는 증거도 댈 수 있다. 이렇게 흔들린다면 사회의 태도가 우리의 의미를 결정하기 마련이다. 무시를 당하면 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자신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고개를 쳐들며, 미소나 칭찬과 마주치면 어느새 역전이 이루어진다. 혹시 남의 애정 덕분에 우리 자신을 견디고 사는 것은 아닐까? (중략)

남의 관심 때문에 기운이 나고 무시 때문에 상처를 받는 자신을 보면,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어디 있나 싶어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

 

물질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관점에서도 우리가 세상에서 차지하는 자리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자리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결정하며, 결과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는지 아니면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는지 결정한다.

 

그리고 두 번째 원인인 속물근성.

속물근성은 아주 적은 예외를 제외한다면 누구에게나 있으며 또한 우리 모두는 속물근성의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살고 있는 듯 하다.

속물의 독특한 특징은 단순히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똑같이 본다는 것이다. 속물의 일차적 관심은 권력이며, 권력 구조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리고 순식간에 속물의 존경 대상도 바뀌기 때문이다.

 

속물 집단은 분노를 일으키거나 죄절감을 안겨준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것으로는 즉, 우리의 지위가 아닌 다른 것으로는 그들이 우리에게 하는 행동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멍청한 아첨꾼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권력이나 명성 때문에 당신을 사귄다고 말하지 않는다. (중략) 유능한 아첨꾼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상대의 지위와는 전혀 관계없는 부분임을 암시해야 함을 안다. 그래서 으리으리한 차, 신문에 등장한 모습, 회사의 임원직위는 자신의 깊고 순수한 애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요소들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아첨꾼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그의 반지르르한 표면 밑에서 변덕스러움을 감지하고 속물의 무리를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운이 좋아 잠시 아슬아슬하게 손에 쥐고 있는 지위가 본질적 자아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속물근성이 자연스레 인간의 본성처럼 굳어져 가는 것은 사회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자연현상과 같은것 일수도 있다. 주변에 늘 마주하는 사회적 상황이 속물근성을 부추긴다는 새커리의 신문에 대한 비판이 무엇보다 와 닿는다. TV프로에 연예인들의 아주 사소한 신변잡기가 뉴스나 화제거리로 매체에 소개될 때 난 새키리와 비슷한 느낌을 늘 받아왔다.

새커리는 영국인이 높은 지위와 귀족계급에 매달리는 원인이 궁극적으로는 신문에 있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매일 작위가 있는 사람과 유명한 사람이 존엄한 존재라고 역설하는데, 이는 결국 작위가 없는 보통 사람들은 시시하다고 역설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중략)

<모닝 포스트>의 궁정란을 보면, 브로엄 경이 브로엄 홀에서 사냥 파티를 열었다는 기사("모두 많이 잡았다"), 애그너스 더프 여사가 에든버러에서 출산할 날이 다가왔고, 조지너 폐이큰햄이 버글리 경과 결혼했다는 기사("신부는 레이스 주름 장식과 코르사주 몽탕을 갖춘 우아한 하얀 새틴 드레스를 입었다. 그녀가 어여뻐 보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등이 눈에 띈다.

 

"이런 같잖은 기사들이 눈엎에 놓여 있으니 어떻게 속물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새커리는 말한다. "속물근성을 만들어내고 퍼뜨리는 신문을 타도하라!"

 

얼마전 모 출판사 대표님과 대화 중,  대략 중학교 정도 되는 나이 또래에서 연예인을 지망생이 엄청나다는 예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 주변엔 그 나이 또래가 거의 없어 직접적으로 체감하지는 못했지만 그 분 주위엔 자주 목격되는 현상이라 하니, 이 역시 대중 매체가 부추겨 놓은 비뚤어지고 편합한 선망, 사회적 현상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등장과 사회의 급속한 발전, 그에 따른 기대 특히 상대적 기준에 따른 만족감의 차이를 설명한다. 언젠가 직장인들의 연봉 만족도는 절대적인 돈의 액수가 아니라 동료보다 조금이라도 더 받는 것에 좌우된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어떤 것 - 예를 들어 부나 존중 - 의 적절한 수준은 결코 독립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준거집단, 즉 우리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조건과 우리의 조건을 비교하여 결정된다. 우리가 가진 것은 그 자체만으로 평가할 수도 없고, 중세 조상의 생활과 비교하여 판단할 수도 없다. 역사적 맥락에서 우리가 놀라운 번영을 이룩했다고 강조하는 소리를 들어봤자 전혀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오직 우리가 함께 자라고, 함께 일하고, 친구로 사귀고, 공적인 영역에서 동일시하는 사람들만큼 가졌을 때, 또는 그보다 약간 더 가졌을 때만 우리는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또한 평등해진 사회가 가져다 주는 기대와 그에 따른 패배감을 소개한다.

17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정치적 사고가 평등주의적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던>(1651)에서  개인은 사회의 탄생 전부터 존재했으며, 오직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 사회에 합류한 것이고, 보호를 대가로 타고난 권리를 내주기로 동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1835)의 '왜 미국인은 번영 속에서도그렇게 불안을 느끼는가'라는 제목의 장에서 불만과 높은 기대, 선망과 평등의 관계를 끈질기게 분석한다.

"출생과 운에 따른 모든 특권을 폐지했을 때, 모든 사람이 직업선택의 자유를 누릴 때, 야망이 큰 사람은 위대한 일을 쉽게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며, 자신이 비범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을 통해 금세 교정되고 마는 망상이다. 불평등이 사회의 일반 법칙일 때는 아무리 불평등한 측면이라도 사람들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대체로 평등해지면 약간의 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

... 그래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이 종종 묘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온하고 느긋한 환경에서도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자존심은 이룬 것을 목표한 것으로 나눈 것이라는 제임스의 방정식을 소개하며 이 방정식에 의하면 행복해 지기 위한 두 가지 방법 즉 목표한 것을 이루도록 더 노력하는 방법과 목표 자체를 줄이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정식을 제시한 제임스는 두 번재 방법의 장점을 지적한다고 한다.

 

"요구를 버리는 것은 그것이 충족시키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이다. 어떤 영역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마음이 묘하게 편해진다. 젊거나 늘신해지려고 애쓰기를 포기하는 날은 얼마나 즐거운가. 우린느 말한다. '다행이야!. 그런 환상들은 이제 사라졌어. '자아에 더해지는 모든 것은 자랑거리일 뿐만 아니라 부담이기도 하다."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다.

 

이러한 가능성의 시대에 등장한 능력주의! 능력주의가 가져다 주는 불안의 측면을 예기한다.

능력과 세속적 지위 사이에 신뢰할 만한 관련이 있다는 믿음이 늘어나면서 돈에도 새로운 도덕적 가치가 부여되었다. 부가 혈연과 연줄을 따라 세대에서 세대로 내려가던 때에는 돈이 부자 부모에게 태어났다는 것 외에 어떠한 미덕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당연시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지능과 능력만을 기초로 위엄 있고 보수 많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이제 부가 품성의 온당한 지표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부자는 단지 더 부유할 뿐 아니라, 더 낫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중략)

성공을 거둔 사람이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면, 실패한 사람 역시 그럴 만해서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 시대를 맞아 정의는 부만이 아니라 빈곤의 분배에도 관여하게 된 것이다. 낮은 지위는 이제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그래 마땅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불안에 대한 요인의 마지막으로 불확실성을 언급한다.

자신의 변덕스러운 재능, 운,  고용주와의 관계와 그의 이익, 세계 경제 등 다양한 요소들을 소개하며 이러한 불확실성에 따른 불안감을 설명한다.

사실 대부분의 영역에서 성취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승진이나 그 반대로 가는 길은 일의 결과와 필연적인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조직의 피라미디를 성공적으로 기어 올라가는 등반가는 자신이 맡은 일에서 최고라기보다는, 문명화된 삶에서는 지침을 얻기 힘든 여러 가지 음침한 정치적 기술에 가장 숙달된 사람들이다.

 

책은 전체적인 글의 흐름을 살짝 방해할 정도로 세부 주제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는데, 이 단락에서도 '음침한 정치적 기술'이라는 것, 15~17세기에 궁정사회의 명민한 귀족들의 정치적 처세의 언급을 소개한다.

 

"사람은 거짓되고, 음험하고, 기만적이고, 교활하고, 자신의 이익에는 탐욕스럽고 남의 이익에는 둔감하므로, 적게 믿고 그보다 더 적게 신뢰한다면 잘못될 일이 없을 것이다." (구이차르디니)

 

"세상은 장점 자체보다는 장점의 표시에 보답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라로슈푸코)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다. 주군의 총애를 받는 신하들의 비위를 맞추지도 않고 그들의 미움을 사도 상관 안 한다. 그저 당신의 주군과 의무를 사랑하며 살 뿐이다. 그래, 그래서 당신이 망한 것이다." (라브뤼예르)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 사랑은 감사의 유대에 의해 유지되지만, 사람은 지나치게 이해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이 유대를 끊어버린다. 그러나 공포는 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유지되며 이것은 늘 효과적이다." (마키아벨리)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사이에 어떤 동지애가 이룩된다 해도, 노동자가 어떤 선의를 보여주고 아무리 오랜 세월 일에 헌신한다 해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지위가 평생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그 지위가 자신의 성과와 자신이 속한 조직의 경제적 성공에 의존한다는 것, 따라서 자신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감정적인 수준에서 변함없이 갈망하는 바와는 달리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잇다. 따라서 늘 불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크게 두 장으로 구성된 책은 앞서 불안의 5가지 원인을 한 장에 걸쳐 설명하고 두 번째 장이자 마지막 장에서는 불안의 해법을 소개한다. 역시 5가지로 구분하면서..

1. 철학, 2. 예술, 3. 정치, 4. 기독교, 5.보헤미안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 때문에 느끼는 불안의 좋은 치유책은 세계라는 거대한 공간을 여행하는 것,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예술작품을 통하여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다.

 

책에서 제시하는 해법은 어떻게 보면 뜬 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 인간이라면 본성에 가깝게 자리잡은 사회적 인정과 부, 명예와 영향력과 같은 포괄적 지위에 대한 갈망에 파생될 수 밖에 없는 불안을 단방에 해소시킬 은탄환이 존재할리 없다. 그것도 자기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해법을 제시할 것이라는 기대는 더더욱 해서는 안될 것이다. 책에서 제시하는 해법은 보다 근원적이다.

 

철학!. 이 얼마나 어린 시절 관심없던 주제였던가. 사실 사회적 성장을 목표하여 나름의 노력을 해 오던 나에게도 가장 직접적인 안식처(?) 된 것이 바로 철학이다. 물론 지금도 완전하지 못한 인성과 사회적 선망을 위애 어찌보면 헛된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철학책과 옛 성인들의 격언과 그들의 생활을 듣고/보지 못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황폐한 정신을 가졌을 것이다. 그나마 읽고 음미했던 철학적 메시지들이 중용을 미를 지키려는 노력을 조금이나마 하게 된 계기라 할 수 있다.

기원전 5세기 초 그리스 반도에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지위로 인한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 가운데는 턱수염을 기른 사람이 많았다. 이 철학자들은 사회에서 차지하는 낮은 지위로 인한 심리적, 물질적 결과에 괴로워하지 않으면서, 모욕이나 비난이나 빈곤 앞에서도 늘 차분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거리에 금과 보석을 잔뜩 매단 행렬이 지나가자 이렇게 소리쳤다. "봐라, 내가 원치 않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코린트를 지나가다가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찾아갔다. 디오게네스는 누더기를 입고 나무 밑에 앉아 있었으며, 무일푼의 신세였다.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손에 쥔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해줄 일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있소." 철학자는 대답했다. "옆으로 좀 비켜주시오. 해를 가리고 있잖소." 알렉산드로스의 병사들은 경악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성질이 급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웃음을 떠드리며, 만일 자신이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면 분명히 디오게네스 같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티스테네스는 아테네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찬양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런, 내가 뭘 잘못했지?"  엠페도클레스도 다른 사람들의 지성에 의심을 품었다. 그는 환한 대낮에 등을 켜들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나는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을 찾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장터에서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본 행인이 물었다. "그렇게 욕을 듣고도 괜찮습니까?" 소크라테스는 대답했다. "안 괜찮으면? 당나귀가 나를 걷어찼다고 내가 화를 내야 옳겠소?"

 

철학은 공상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히 이성적이라 할 수 있다. 시대적 상황, 사회적 상황, 상대적인 상황 등에 따른 변덕스러운 가치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의 가치를 이성이라는 도구로 걸러내도록 하여 내면의 평화와 자존감을 올려 준다.

철학적인 접근방법의 장점은 심리적인 면에서 드러난다. 누가 우리에게 반대하거나 우리를 무시할 때마다 상처를 입는 대신 먼저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 정당한지 검토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비난 가운데도 오직 진실한 비난만이 우리의 자존심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며 자학하는 습관을 버리고 그들의 의견이 과연 귀를 기울일 만한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사랑을 구하는 사람들의정신에 존경할 만한 구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다.

 

염세적 태도의 전형적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다음의 말은 이러한 맥락의 좋은 본보기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피상적이고 하찮다는 것, 그들의 시야가 편협하다는 것, 그들의 감정이 지질하다는 것, 그들의 의견이 빙퉁그려졌다는 것, 그들의 잘못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점차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철학자들은 함께 모여 연구를 한 것도 아닌데 입을 모아 외부의 인정이나 비난의 표시보다는 우리 내부의 양심을 따르라고 권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질책은 그것이 과녁에 적중하는 만큼만 피해를 줄 수 있다. 자신이 어떤 질책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만만하게 그런 질책을 경멸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 

 

철학 다음 해법으로 예술을 소개한다.

개인적으로 위대한 예술을 특히 고전 예술을 접해보거나 관심을 크게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나 저자의 말대로 예술은 철학 못지 않게 삶의 본연을 들여다 보게 하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위대한 영화도 현세에서는 위대한 예술작품에 버금가는 매체일텐데 영화에서 배우는 많은 삶의 본질을 떠올려보면 과연 예술이 정신 건강에 주는 긍정적 효과를 알 수 있다.

아널드의 말에 따르면 위대한 예술은 구름 잡는 이야기이기는커녕, 삶의 가장 깊은 긴장과 불안에 해법을 제공하는 매체다. "<데일리 텔리그라파>의 젊은 사자들"에게 예술이 아무리 비실용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예술은 무엇보다도 존재의 부족한 부분을 해석하고 그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보라. 아널드는 제안한다. 거기에는 (직접적이든 아니든) " 인간의 잘못을 없애고, 인간의 혼돈을 정리하고, 인간의 곤궁을 줄이고자 하는 욕망"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세상을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낫고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갈망"에 사로잡혀 있다.(중략)

그들이 작품에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항의가 나타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교육하고, 고통을 이해하거나 감수성에 다시 불을 붙이도록 돕고, 감정이입 능력을 길러주고, 슬픔이나 웃음을 통하여 도덕적인 균현을 다시 잡아주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샤르댕이나 존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쾨브케의 예술에도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지배적인 물질적 관념에 도전하는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 세 화가는 여름날 저녁의 하늘, 햇볕에 달구어진 얽은 벽, 환자를 위해 달걀 껍질을 까는 미지의 여자가 우리 눈이 보고 싶어 하는 가장 아름다운 광경에 끼지 못한다면, 우리가 존중하고 갈망하도록 배워온 많은 것의 가치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중략)

일상생활을 묘사한 위대한 화가들은 제인 오스틴이나 조지 엘리엇처럼 세상에서 무엇을 존경하고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속물적 관념을 교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비극과 희극 역시 불안을 경감시키는 예술의 측면으로 소개하는데 먼저 비극을 보게됨으로서 느끼는 주인공에 대한 공감과 자신의 반성이 자만심을 버리도록 돕고 출세지향적 사고의 틀에 영향을 준다고 본다.

주인공에 대한 동정심, 주인공과 동일시를 했기 때문에 생기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은 비극을 감상한 뒤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감정적 결과다. 비극 작품은 재앙을 피하는 우리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가르치며, 동시에 재앙을 만난 사람들에게 공감을 느끼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따라서 극장을 나설 때면 쓰러지고 실패한 사람들을 우월한 태도로 대하기가 어려워진다.

 

비극 작품은 아주 작은 단계들, 종종 아무 뜻도 없어 보이는 단계들을 통하여 교묘하게 주인공의 성공을 몰락과 연결시켜 나간다. 우리는 의도와 결과 사이의 비틀린 관계를 만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신문에서 단순히 실패의 이야기의 뼈대만 읽었을 경우라면 가지게 되었을 무관심한 태도, 또는 적의에 찬 태도를 버리게 된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를 얻게 만드는 수단은 늘 변화해 왔다. 불안의 해소로 소개한 것들중 '정치'가 있는데 좀 생뚱맞다. 그러나 저자가 선정한 정치라는 개념은 다음 글에서 이해할 수 있다.

높은 지위를 결정하는 요인들이 계속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지위에 대한 불안을 촉발하는 요인들도 바뀌어간다. 어떤 집단에서는 짐승의 옆구리에 창을 꽂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걱정하고, 어떤 집단에서는 전투에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걱정하고, 어떤 집단에서는 신에게 헌신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걱정하고, 어떤 집단에서는 자본 시장에서 이윤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걱정한다.

자신이 사는 사회의 이상 때문에 불안이나 실망을 느낀 사람이라면 이렇게 대충 살펴본 지위의 역사에서도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실을 간파할 것이다. 그런 이상이 돌로 만들어져 굳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상적인 지위는 오래전부터 계속 바뀌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이런 변화과정을 묘사하는 데 정치라는 말을 사용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글을 통해 변덕스러운 정치적 가치에 한계를 인식하고 궁극의 가치 실현에 관심을 가진다면 적잖이 불안이 해소될 것이라는 기대를 해 볼수 있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기독교'를 든다. 좀더 포괄적인 관점에서 보면 '종교'가 될 수도 있겠다.

톨스토이는 죽임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을 살핀 기록인 <참회록>(1882)에서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로 세계적인 명성과 부를 얻은 뒤인 쉰한 살 때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가치나 신의 가치를 따라 산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가치를 따라 살았으며,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강해지고, 유명해지고, 중요해지고, 부유해지고자 하는 불안한 욕망을 품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속한 사교계에서는 "야망, 권력에 대한 집착, 선망, 호색, 오만, 분노, 복수를 존중했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자 이전의 야망들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심이 생겼다. "'그래, 사마라에 땅 6,000데샤티나, 말 300마리가 있다 치자.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 그래, 고골이나 푸슈킨이나 셰익스피어나 몰리에르보다, 세상의 모든 작가들보다 더 유명해진다고 치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의 의문을 가라앉힌 답은 신이었고, 톨스토이는 여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살게 된다. (중략) 이것은 죽음에 대한 생각이 삶의 더 진정한, 더 의미 있는 길의 안내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폐허는 세속적 권력이라는 불안정한 보답을 얻으려고 마음의 평화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말한다. 낡은 돌들을 보다 보면 성취에 대한, 도는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이 누그러드는 것을 느끼게 된다.

(중략)

이런 소멸의 전망에 위로의 힘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우리의 불안의 많은 부분이 우리의 기획과 관심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상 때문에 괴로워하며,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너무 크게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이상적인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존엄과 자원의 기본적 평등 덕분에 승자 옆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제어되고 경감된다. 성공하여 피어날 것이냐 아니면 실패하여 시들 것이냐 하는 이분법의 그 가혹한 칼날도 약간은 무디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유로운 영혼, 보헤미안과 그들의 사상/가치를 소개하며 세속적 가치를 다르게 해석하는 또 다른 집단의 사고체계에서 보편적 진리처럼 과대포장되어온 사회적 지위를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다고 힌트를 주는 듯 하다.

"부르주아지를 증오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그렇게 썼다. 이것은 19세기 중반 프랑스 작가들의 일반적인 발언으로, 그에게는 이런 경멸이 여배우와 연애를 하고 동양을 여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직업을 보여주는 표지였다. 플로베르는 부르주아지가 극단적으로 점잖은 척 행동을 하고, 물질주의적이며, 냉소적인 동시에 감상적이고, 하찮은 것에 몰두한다고 비난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멜론은 야채냐 과일이냐, 그것을 첫 번째 코스로 먹어야 하느냐(프랑스식) 아니면 후식으로 먹어야 하느냐(영국식) 같은 문제를 놓고 끝도 없이 논쟁을 한다는 것이다. 역시 이 계급을 좋아하지 않았던 스탕달은 이렇게 주장했다. "진짜 부르주아들의 인간과 삶에 대한 대화는 추하고 잡다한 말들이 집합체에 불과하며, 한동안 어쩔 수 없이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보헤미안의 가치 체계에서 순교자적 인물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또는 여행이나 친구와 가족에게 헌신하기 위해 안정된 정규 직장과 사회의 존경을 희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런 헌신 때문에 외적인 품위의 표시는 부족할지 몰라도, 보헤미안들의 세계에서는 최고의 명예를 누릴 자격이 있었다. 그들의 윤리적 양식과 감수성과 표현 능력 때문이었다.

 

집단과 그 전통은 열등하다는 보헤미아의 믿음과 더불어 개인의 우월성에 대한 강조가 나타났으며, 이와 더불어 관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나타났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말에 따르면, 어떻게 살고, 옷을 입고, 먹고, 쓰느냐 하는 문제에서 다른 사람들의 관념에 맞추다 보면 얼굴에 서서히 "우둔한 표정"이 나타나게 된다. 모든 고귀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금언을 따라야 한다. "나는 내가 관심을 가지는 일을 하지, 다른 사람들이 요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에머슨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제 순응이니 조화니 하는 이야기는 더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그런 말들을 관보에 실어 조롱하도록 하자... 이제 결코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지 말자... 이 시대의 매끈한 평범함과 비열한 만족을 모욕하고 질책하자."

 

서서히 저저의 결론에 도달한다.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산업가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보헤미안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으며,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철학자로부터 인정 받을 수도 있다.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저자 역시 인정하며 다만 선택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지위에 대한 요구는 불변이라 해도, 어디에서 그 요구를 채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창피를 당할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은 어떤 집단의 판단 방식을 우리가 이해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결국 우리가 따르는 가치와 관련이 되는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따르는 것은 두려움을 느껴 나도 모르게 복종을 하기 때문이다. 마취를 당해 그 가치가 자연스럽다고, 어쩌면 신이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거기에 노예처럼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너무 조심스러워 대안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 이 다섯 집단은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수치와 명예의 구분 자체는 유지하면서, 무엇이 각 항목에 속해야 하는지를 재규정하려 했다. (중략)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길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우물안의 개구리'라는 말이 있다. 개구리에게 우물안 세상만이 전부인 것 처럼...

 

바쁜 일상을 살다보면, 현재 자신이 속한 집단과 그 집단이 해야 할 일에 파묻혀 있다 보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그 속에 견고히 자리잡고 있는 편협한 사회적 가치에 갈망하고 괴로워하는 우리 자신을 드물게 목격하게 된다.

 

정신이 그나마 조금 풀린 주말 산책 길에서 혹은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논하는 책을 볼때, 교양의 테투리에 포함된 음악을 감상할때, 뛰어노는 아이들이 자신에게 보이는 절대적 신임의 눈망울 속에서.... 간혹 무엇을 위해 이 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사회적 가치와 그에 대한 열망은 늘 우리의 정신을 잠식하는 강력한 지배주로 견고히 다시 자리잡게 된다.

 

책의 저자도 예기했듯이, 사회적 가치의 긍정적인 측면을 무시하지 않으며 그 가치를 위한 고군분투의 아름다운 측면도 간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가 인생 전반에 끼어들어 정신적 황폐화에 절대적으로 기여한다면 가치의 다양성을 재고하고 인간/인생의 궁극적 가치를 들여다 봄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다독여 주어야 한다.

 

높은 사회적 지위와 풍족한 물질적 부의 중요성 못지 않게 정신적 부와 인간적 지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보다 풍족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보며,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사회적 지위와 명예, 그리고 영향력과 물질적 풍족함을 위해 내가 가진 능력 범위에서 최선을 다하겠노라.

그 가운데 얻게 되는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라도 절망감 없이 받아 들일 것이다. 다만 가장 명심할 것은 내가 열심히 해 왔다는 증거는 반드시 남겨야 겠다. 그 증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아주 다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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